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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태조 이성계 조선건국 왕이 되는 과정_조선시대

by §§▒▒§§ 2022. 11. 3.

우리가 조선에 대해서 배울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인물은 바로 이성계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태조 이성계라 불리는 것처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태조 이성계에 대하여 알아보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성계와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의 등장

14세기 중반, 조선이 있기 전 고려는 그 유명한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힘이 약할 대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몽골과 싸우기 전에는 약 300만 명의 인구가 20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니 어느 정도였는지 감이 오실 거라고 봅니다. 결국 몽골에 항복하여 몽골의 속국으로서 겨우 유지되고 있었으면 홍건적과 외구의 잦은 침입으로 그야말로 고려의 최대 위기였습니다. 난세에 영웅이 생기는 법, 고려의 공민왕이 그 영웅입니다. 원나라 또한 몽골의 침략으로 힘이 약해지자 원나라는 배척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는 등 많은 영웅다운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때 지역의 유력인사인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이성계가 공민왕에게 협력하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가별초라는 독자적인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이자춘, 이성계 부자는 고려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인물들이 이었기에 공민왕의 신하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이자춘, 이성계 부자에게 관직을 내리고 세력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공민왕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북쪽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활약하기 시작합니다.

 

가별초를 앞세운 이성계의 활약

 

1361년 10월 독로강만호 박의가 일으킨 반란군을 가별초 1500명을 이끌고 참전하였고 1361년 11월에는 홍건적과 전투를 하여 전공을 세웠지만 결국 홍건적에게 개성을 빼앗기며 고려가 패배했습니다. 두 달 후 1362년 1월에는 개경 수복 전이 시작되고 이성계가 가장 먼저 가별초 2000명을 이끌고 성벽을 오르면서 큰 공을 세웁니다. 이어 나하추의 침략과 덕흥군의 침략을 격퇴하는 등 이성계는 고려는 유명하는 장수가 됩니다. 무장으로 입지를 다진 이성계는 귀족으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신청강씨 강윤성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장남인 이방우는 찬성사 지윤의 딸과 결혼을 하여 인척으로서 귀족의 대열에 서게 됩니다. 이 때문에 당시 공민왕의 충신 신돈이 적대적인 무인들은 숙청하고 다녔는데 이성계는 인척관계로 신돈과 연이 있었기에 숙청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성계와 정몽주의 만남과 공민왕의 사망

1364년 2월 이성계가 화주에 침입한 삼선과 삼개를 격퇴할 당시 정몽주를 만나게 되고 둘은 우정을 쌓기 시작합니다. 둘은 서로를 존중하고 아꼈으며 이성계가 전쟁에 참전할 때에는 정몽주도 함께 참전시켜달라고 공민왕에게 요청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1374년 공민왕이 자제위 홍륜에게 피살당하고 아들 우왕이 즉위했습니다. 공민왕이 후계자에 대한 명확한 지목 없이 피살당하는 바람에 주변국에서는 우왕을 고려의 왕으로 인정하고 대우해주지 않았습니다. 주변국에서 고려는 호시탐탐 노리자 우왕은 이성계를 수도인 개경으로 불러 왕을 호위하게 합니다. 이때 이성계의 위치가 크게 바뀝니다. 이전에는 변방을 지키는 유명한 장수였다면 이제는 수도를 지키면서 고려의 중앙군을 통솔하는 대표 장수가 되면서 동북쪽뿐만 아닌 고려의 전체가 이성계의 지휘권 안에 들어오게 되면서 남쪽으로 쳐들어오는 외구도 격퇴하는 등 이러한 전공으로 이성계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과 세력 확장

이성계와 가까운 사대부하면 정도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소개로 정도전과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정확한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이성계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최고의 장수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최영 장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나 무장으로나 최영 장군의 고려 최고의 장수였습니다. 1388년 철령위 문제로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마찰이 생기게 되고 최영은 명나라를 혼줄내 줘야 한다며 요동정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4 불가론을 내세우면 반대했으나 이성계와 최영 장군의 위치는 달랐습니다. 최영 장군은 본인이 직접 요동정벌에 나서려고 했으나 우왕의 만류로 좌군도통사 조만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위해 떠나게 됩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성계와 조만수는 5월 7일 압록강 중앙에 위치한 위화도에 도착하게 되었으나 마침 장마가 시작되어 비도 오고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이성계는 철수를 요청하지만 최영 장군과 우왕은 이를 거절합니다. 결국 이성계는 조만수 등 장수들을 설득하여 군사들은 이끌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공격하게 됩니다. 무리한 원정을 강행한 최영 장군에 대한 숙청을 목적으로 똘똘 뭉친 부대는 결국 개경을 함락시키고 쿠데타에 성공합니다. 최영 장군을 귀향 보내어 사형시키고 우왕을 폐위시켰습니다. 이때부터 이성계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

자기보다 잘난가는 관료나 뛰어나지만 자신이 컨트롤하기 힘든 장수 등 나중에 위협이 될만한 사람은 모두 숙청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정몽주였습니다. 정몽주는 이성계를 회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이성계 또한 정몽주를 회유하려는 노력을 하는 등 둘의 친분은 두터웠습니다. 그러나 정몽주는 이성계를 숙청하고 그 측근들은 숙청해야 고려의 멸망을 막고 조선의 건국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숙청해야 한다고 건의하지만 이성계는 반대했고 이방원은 본인의 판단으로 정몽주를 죽였습니다. 이성계는 이 일에 크게 화가 나 부자지간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죽은 정몽주를 역적으로 몰아 사후 숙청을 하며 1932년 7월 17일 고려 34대 왕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선위 하며 고려는 멸망하고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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